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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임순철 (1) 1952년 제주 한 고아원서 시작된 ‘구원의 삶’
  • 2012.04.29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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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지독한 아픔과 슬픔을 안고 살았다. 너무 감당하기 어려워 떨쳐내려고 발버둥을 쳐봤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의 미약함만 확인했다. 어쩔 수 없이 숙명 같은 아픔과 슬픔에 울부짖으며 살아야 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욥 5:7)고 하지만 내 인생은 너무나 처절한 고난의 길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그 덫에서 벗어났다. 소리 없이 찾아와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사랑으로 지옥과도 같던 그 덫을 걷어냈다. 그분의 피 묻은 손이 나를 만져주심으로써 구원을 받았다. 지금도 주위에서 간혹 내 길을 고난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그분이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 내 길은 오히려 영광의 길이 됐다. 참으로 고마운 그분을 위해 살고 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나의 가장 오래 된 기억은 제주도의 한 고아원에서 지내던 시절이다. 언제나 허기진 배를 채울 만한 것을 찾아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던 어릴 때의 내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옷인지 넝마 조각인지 구분할 수 없는 차림에 누런 콧물을 질질 흘리며 해골 같은 모습은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였다.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한국전쟁이 막 끝난 그때는 참으로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일반 가정도 그럴진대 고아원에서야 어떻겠는가. 구제품이 들어온다곤 하지만 고아원 원생들이 나눠 먹고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의 출생에 관해서는 1952년 제주도의 어디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밖에 모른다. 훗날 들은 이야기로는 낡은 포대기에 싸인 채 길거리에 버려진 핏덩이를 누군가가 주워서 고아원에 맡겼다고 했다. 고아원에서 여기저기 젖동냥을 해서 겨우 생명을 이어가긴 했지만,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먹을 게 없나 이리저리 살피며 논둑길을 걷고 있는데 큼지막한 시루떡 덩어리가 눈에 띄었다. 말 그대로 웬 떡인가 싶었다. 앞뒤 잴 필요 없이 달려가 떡을 주워 들고 맛있게 먹었다. 지금 생각하니 무속인들이 굿을 하고 나서 버린 고사떡이었던 같다. 다행히 아무 탈이 나지 않았다.

고아원에서 나는 원생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요즘 말로 하면 왕따였다. 유난히 병치레가 잦은데다 울보였던 나를 그들은 만만하게 보았던 것이다. 한 번은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다가 몇 명이 합세해 나를 아득한 낭떠러지 밑으로 밀어버렸다. 다행히 죽진 않았지만 팔이 부러지고 온 몸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어린 시절이었다. 내 눈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하지만 그 고단한 삶마저도 내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불시에 그 고아원을 떠나야만 했다.

다섯 살 쯤 됐을 때였던 것 같다. 나는 찐빵 만드는 집의 수양아들로 들어가게 됐다. 주위에서 “찐빵을 많이 먹겠다”며 부러워했고, 나 자신도 배고픔을 면하겠다는 생각에 좋아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고 오산이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노동이었다. 입양 들어가는 첫 날부터 수양아버지는 바닷가에 가서 해초를 걷어 오라고 시켰다. 이튿날부터 내가 그 집에서 해야 하는 일은 크고 작거나, 어렵고 쉽거나를 가리지 않았다. 소똥을 주워서 바위에 말려 땔감으로 만드는 일도 했고, 어부들이 쉬어가는 하숙집을 드나들며 잔심부름도 했다. 한 마디로 어린 노예였다. 그렇다고 먹는 게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고아원에 있을 때 못지않게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다.

◇임순철 목사=1952년 제주도 출생, 예장 통합 제주성서신학원 졸업, 백석대 신대원 졸업, 일본 선교사, 서울 고척동 비전명성교회 담임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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